서울올림픽 유치성공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네 한국인에 있어서 서울올림픽만큼 가슴설레이는 감격과 뿌듯한 긍지를 심어준 것은 따로 없다. 아니우리 세대에 두번 다시 그와 같은 거창한 과업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을 성싶지 않다.
올림픽을 치른 지도 벌써 37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서울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이에 관한 회고담이나 실록들이 숱하게 쏟아져 나왔음을 기억한다. 한결같이 서울올림픽에 자신이 얼마나 큰 기여를 하였는가를 은근히 자랑하는 그런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것도 각기 다른 대개의 일들은 알려질 대로 알려져서 새삼 보태서 해야 할 이야기는 없지 않겠느냐하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이야기들을 읽고 난 느낌은 미처 손대지 못한 채 파묻혀 버린 일들 그것도 아주 소중한 이야기들이 아직도 있다는 아쉬움을 느껴왔다.
햇빛 비치지 않은 밑바탕 숨은 곳에서 전심 전력을 다한 공헌이 있었음에도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일들이 꽤나 있다. 큼직큼직한 일들이 아니라 할지라도 조그만 조각들이 쌓이고 쌓여 그러한 작은 일들의 쌓임이 없었던들 결코 큰 성과가 나올 수 없었을 조각들.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려 온 그런 단편들을 밝혀두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올림픽하면 화려한 식전 지구촌 젊은이들의 힘과 기의 겨룸 그리고 이들이 한 곳에서 함께 생활하는 선수촌을 금방 생각하게 된다.
사실 이 세 가지가 올림픽 개최의 세 기둥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올림픽경기는 이름 그대로 경기행사가 그 본질이다. 제 아무리 화려한 식전행사, 나무랄 데 없는 선수촌 시설이라 하여도 경기운영에 문제가 생기고 스포츠 영웅이 출현하지 않으면 올림픽 역사에 크게 기록되지 않음을 보아왔다.
그러한 모두를 다 갖춘 서울올림픽이었기에 올림픽 사상 가장 성공적 대회라는 것이 세계적인 평이다. 그러기에 외국에 나가노라면 숱한 스포츠맨들로부터 지금도 서울을 꿈꾼다는 영합 아닌 그리움, 추억을 곧잘 듣는다.
이러한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의 공은 아무래도 조직을 맡은 분들에게 1차적으로 돌려져야 함은 이론이 없다. 하지만 다른 한편 개최국 국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성공적인 준비도 중요하지만 자국 선수단의 좋은 성적없이는 결코 갈채를 보내지 않는 소박한 정서가 있다. 이 점에 있어서도 우리는 후회없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 모든 성공을 거두게 한 단초는 바로 대회 유치의 성공이었다. 바덴바덴의 신화를 빼고 서울올림픽은 이야기할 수가 없다. 바로 이 유치성공에 얽힌 여러가지 일들이 다른 분야에 비해 낱낱이 밝혀지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는 데서 몇 가지 일들과 이에 관계했던 이들의 이름을 밝혀두고자 한다.
유치의 횃불
1979년 3월에 접어들면서 체육회 안에서는 올림픽 유치가 공공연한 화제거리였다. 체육회관의 신축 이전, 빈약한 재정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골프장을 겸한 리조트의 서울근교 설치안 등, 그렇지 않아도 의표를 찌른 기발한 아이디어를 기관총처럼 쏟아 내는 박종규 회장의 또 하나의 착상이겠거니 하고 며칠이 지나갔다.그러나 이 소문은 현실이 되어 박 회장으로부터 “제24회 올림픽 서울유치에 관한 객관적 가능성 및 시의성을 연구검토하여 계획안을 작성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지시를 받은 사람은 당시 대한올림픽 부위원장인 김세원 씨, 이 분은 스웨덴대사를 마치고 본부대사로 와 있던 참이었는데 국제 스포츠외교를 강화키 위해 외무부에 요청하여 영입하였던 분이었다. 또 한 사람은 청와대 문교담당 비서관이었던 주관중 상근이사(현 경희대 교수)였다. 이 두 사람이 주축이 되어 연구검토는 급피치를 올리고 작성실무진은 세 사람의 전문위원이 맡았다.
전문위원 세 사람. 이태근 씨는 서울대 문리대 정치과 출신으로 영, 불 2개국어에 아주 능통한 사람이었고 김예식씨 역시 같은 대학 같은 과를 함께 나온 민간연구소 연구원으로 왔던 사람이다. 또 한 사람 이원웅 씨는 연세대 출신의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민간연구소 출신이었다. 당연히 이 다섯 사람이 한 팀이 돼서 며칠밤을 새우더니 지시된 날짜에 큰 틀이나마 일단 계획서가 완성되었고 보고서를 첨부한 ‘올림픽 유치에 관한 지침의뢰’가 문교부에 발송된 것은 3월 16일이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박종규 회장 특유의 밀어부치기식 강행군의 산물이었다.
그 때까지만 하여도 언론기관에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을 뿐더러 체육회 내부에서조차 설마 올림픽을 유치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대수롭지 않은 눈길이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서 체육회 및 올림픽 위원회의 중지를 모은 것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22일 전문위원실에서 보완해서 다시 작성한 ‘유치계획의 사회경제적 실현가능성’이라는 자료와 함께 문교부측이 작성한 검토안을 놓고 드디어 국민체육 심의위원회의 7인 소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신현 경제기획원장관,박찬현 문교부장관, 박동진 외무부장관, 정상천 서울특별시장, 김택수(IOC 위원 불참), 윤일균 중정차장. 그리고 박종규 체육회장이었다. 회의는 영국, 브라질, 벨기에, 호주, 일본, 알제리,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의 여덟 나라가 유치 의사를 밝히고 있는데, 그들 나라에 비해 나을 것이 없는 우리나라가 과연 경쟁에서 이길 수 있겠느냐는 것과, 막대한 개최경비를 어떻게 감당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제를 두고 꽤나 갑론을 박이 벌어졌으니, 1978년에 개최한 제42회 사격선수권대회의 성공에서 자신을 얻은 박종규 회장의 강력한 주장과 정상천 서울시장의 적극적인 동조로 부정적이었던 분위기였지만 그다지 과중하지 않은 재정적 부담이라면 하는 꼬리표를 붙여 어렵사리 유치 찬성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1979년 9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의 국력과시를 통한 경제발전의 발판조성과 세계평화 및 우호증진에 기여, 공산권 및 비동맹권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확대, 국민의 일체감 형성, 그리고 한국 스포츠의 발전계기와 국제적 지위향상을 위하는 등, 거시적 차원에서 유치는 필요하며, 올림픽과 함께 1968년 아시아 경기를 유치해 놓고도 반납한 적이 있는 불명예를 되찾기 위해서도 아시아경기까지 유치토록 하라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올림픽경기를 덤까지 붙여서 말이다. 박 대통령 자신이 시해당하기 36일 전의 일이었다. 정부와 체육회는 부산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대통령의 확고한 의사결정이 내려졌으니 그 때까지만 해도 내심 반대하기는 하나 내놓고 반대하지 못했던 사람들조차 그 어느 누구도 소리내어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이 결정에 드러내 놓고 반대할 수는 없는 일.
그러니까 1979년 3월에 있었던 유치에 관한 정부지침 요령은 박종규 회장과 박정희 대통령 사이에 교감이 있고 난 다음의 시동을 거는 첫 절차였었고, 대통령의 재가는 이미 내정돼 있는 방침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했다.
박종규 회장이 체육회 간부들과의 식사자리에서 밝힌 말이다.
어찌됐든 1979년 10월 8일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박종규 체육회장과 정상천 서울시장은 김택수 IOC위원, 정주영 전경련회장, 박충훈 무역협회장, 김영선 대한상공회의소 소장 등이 동석한 가운데 1988년의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겠다고 내외에 밝히기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박종규 회장의 강력한 드라이브 결과였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물밑 속의 유치활동 – 박종규 회장의 퇴진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의 비명의 죽음은 국가적 대혼돈을 가져왔고, 올림픽 유치도 예외는 아니었다.
올림픽 유치의 확고한 의지 표명이라는 국가원수의 죽음이 그렇지 않아도 박 대통령의 비호 아래 행해져 왔던 박종규 회장의 독선적 행태를 곱게 보지 않고 있던 많은 사람들의 차가운 눈초리가 고울 수가 없었다. 올림픽 유치도 합의를 거치지 않은 그 혼자만의 작품이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더니, 그 누구도 올림픽 유치를 걱정하거나 말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
또 세상 돌아가는 양상이 올림픽 유치를 말할 수 있는 그러한 판국도 이니었다. 국보위가 생기고 80년 7월 14일, 국보위는 박종규 회장을 임기만료 전 중도하차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후임회장으로 선출된 분이 조상호 회장이다.
언뜻 보기에 이제 올림픽 유치는 물 건너간 한때의 화제거리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체육대회 내부에서는 유치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도리어 소중하게 가까워지고, 커지고 있었다. 조상호 회장은 부임하자마자 당면한 문제들을 추진하는 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는 간부회의를 연일 열었다. 박종규 회장과는 아주 대조적인 분으로 반드시 자기를 보좌하는 간부들과 숙의를 하고 얻어진 결론을 추진하는 말하자면 철저한 민주형이었다고 하겠다.
참조: 서울올림픽 유치 2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