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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올림픽 유치 3편

 

들이 닥친 조사단들

1981년 3월 11일 IOC는 전문으로 IOC와 NOC’S(국가별 올림픽위원회연합) 그리고 ISF (국제경기연맹연합)의 조사단을 차례로 파견한다고 알려 왔다.

3월 11일. 재빠르게 NOC 조사단으로서 미국 올림픽위원 ‘돈밀러’, 영국 올림픽위원회의 ‘리챠드 파머’ 두 사무총장이 내한했다. 두 사람 다 IOC와 각국 올림픽위원회에 큰 영향력이 있는 인사였다.

그러나 이들은 개략적인 문제만 살피고 갔을 뿐 크게 당황하지 않은 조사였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4일부터 4월 8일까지 체한한 IOC조사단은 사정이 판이하였다. ‘쥬리오 오네스티’ 이탈리아 IOC위원, ‘제임스 워랄’ 캐나다 IOC위원, ‘페드로 바스게스’ 멕시코 IOC 위원의 3인에다 IOC본부직원 ‘로즈마리 듀크’ 일행은 올림픽을 직접 치를 실무진과 1대 1로 질문회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기습적인 일이었다.

4월 8일 9시부터 신라호텔에서 질문을 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고, 그야말로 급조실무진이 구성되었다.

인선은 해당분야를 알고 영어 또는 프랑스어로 그들의 질문에 답하고 주장을 펼 수 있는 사람을 단시간내에 모아야 했다. 어려운 일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미 ‘나고야’를 거쳐서 서울에 온 그들에게 ‘나고야’ 보다는 앞서가고 있다는 인식을 줘야 한다는 명제가 있었다.

한국측 실무협의진으로서는 김세원, 최만립 양부위원장, 선우 양국, 김기호, 최호 세 KOC위원, 손홍규 서울시 사무관에다 김정철 정립건축연구소장, 나머지 7인은 사무차장인 나와 선인원기획실장, 김성규 국제부장, 오지철 국제과장 그리고 예의 세 사람 전문위원이 늘어 앉았다.

그 전날 저녁, 각자는 자기가 설명하고 답변할 내용을 대충 검토할 시간밖에 없었다.

김기호 위원이야 ‘도핑’ 문제 전문가로서 IOC의무 위원회에 여러번 참석하였으니 별 걱정이 없었지만, 미디어 부문을 맡은 최호 씨는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자신이 비록 기자 출신이고 외국어 실력이 뛰어나지만 핵심의 국내 언론기관에서는 코리아 헤럴드 기자 한 사람 외에는 단 한사람의 기자도 참석을 않고 보니 또다시 체육회 직원들이 기자로 둔갑하여 질문회를 이어 갔고 그 결과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좋았으니 최호 씨의 공이 크다고 칭찬이 자자하였음을 기억한다.

실무 협의회에서도 급조 전문가들이 용케도 버티어 나갔다. 평소에 알고 있는 영어단어도 막혀 버리고, 말은 제대로 매끄럽지 않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는 세 시간이 지나갔다.

어찌어찌해서 다 끝난 다음의 식사시간에 그들의 사견이 나고야에 비해 실무진이 훨씬 전문적인 지식이 있고, 통역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설명을 하는 것을 보니 인상이 깊다는 평에 또다시 등에서 왈칵 땀이 솟이 남을 느꼈다.

이 실무진협의회 또한 그들 조사단에 좋은 인상을 준 조그마한 기회였다.

게다가 나고야에 비해 계획서상에서만 아니라 실제 7만여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대경기장이 어느 정도 완공단계에 있음을 직접 볼 수 있었고, 그 배후에 80만평에 이르는 광활한 넓은 땅에 경기장과 선수촌을 건축한다는 우리의 설명을 쉽게 수긍할 수 있게 하는 여건이 있었음은 분명 다른 나라보다는 우리 쪽에 유리하게 비춰졌을 것이었다.

이래 저래 또 하나의 고비를 넘기게 된 것이다.

 

‘바덴바덴’에서의 네다섯 가지 이야기

이미 다 알고 있듯이 정주영 전경련 회장을 비롯한 6인의 정대표, 총리실, 문교부, 서울시, 그리고 KOC에다 민간기업의 그룹 총수들, 외무부 외교관의 ‘바덴바덴’ 집결, 유럽주재 각 신문사의 특파원 등 총수 96인에 이르는 대가족, 그 중에는 일정선 이상의 인사들의 배우자까지 동원하여 그야말로 입체적이고도 총체적인 현지활동을 전개한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게도 절실하던 활동자금도 각 기업 총수들이 다투어 협찬하고 보니 KOC로서는 격세지감이었으리라.

1억 5천만 원의 스포츠 외교 활동비에 오직 의지하여 소리없는 활동을 계속해 왔던 KOC로서는 당연히 그러한 느낌이었다. 김세원 대사가 정년으로 대사직을 물러감과 함께 KOC에서도 퇴임하여, 전상진 대사가 다시 영입되었다. 이 분 역시 대단한 뚝심이 있는 분으로서 김 대사가 나름대로의 분석과 세심한 분석에 바탕을 두고 밀어부치는 애국애족의 화신이라면, 전상진 대사는 체격자체가 뚝심과 끈기를 연상케 하는 분이어서 두 분 다 추진력에서는 난형난제였고, 부위원장과 명예총무를 겸한 최만립 씨는 미국인과 다를 바 없는 영어실력에다 소탈한 성격으로 해서 누구나 쉽사리 친해질 수 있는 재능의 인사였다.

조상호 위원장으로서는 이 세 분의 보좌를 받았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바덴바덴에서의 모든 일을 기록한다는 것은 책을 한 권 다시 써도 모자란다. 그러므로 네 다섯 가지 에피소드만 소개하고자 한다.

구 철도역사의 전시실꾸미기

1981년 9월 30일의 바덴바덴 IOC총회일이 다가오자, IOC에서는 각 입후보국에 전시실을 배정하였다. 쓰지 않던 역사 대합실 자리에 ‘나고야’ 와 함께 백 평 정도의 넓이라는 것이었다. 전시실을 꾸미기 위해서는 우선 장소의 넓이와 출입구, 채광, 조명, 그리고 기둥 같은 구조물, 높이 등 여러가지 요소를 종합하여 디자인하고 설치 공사를 해야만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설치 공사의 설계자, 디자이너와 함께 현지에 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 때의 KOC 형편으로서는 수명의 요원을 파견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때마침 KOC문화위원인 ‘큐빅’의 조성열 씨가 유럽으로 디자인 관계의 국제회의를 간다는 것이었다.

궁하면 통하는 법. 우리는 그로 하여금, 바덴바덴까지 발을 뻗쳐 현장을 파악하고 오도록 요청하였다.

한푼 여비 보조도 없이 말이다. 돌아온 그는 참으로 정확하고 세밀하게 파악한 도면을 제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곧 설계와 디자인 작업이 진행되고 현지에서 제작하기보다는 서울에서 제작하여 현지로 보내 조립식으로 설치키로 하였다. 이 계획은 들어 맞았다.

그런데 예상외의 큰 성공을 거둔 것이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서울 메인스타디움과 그 주변의 개발 후의 완성모형의 출품이었다.

이 모형은 서울시가 공사현장에 장치하여 관람시키고 있었던 것인데 이를 빌려 간 것이 IOC나 각국 NOC위원들에게 서울이 얼마나 올림픽을 열성을 다하여 계획하고 준비하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가장 설득력 있는 물건이 되었다는 것이 물 사람의 느낌이었다고 한다.

‘나고야’는 전시실에서 또 우리에게 한방 얻어 맞은 결과가 되었다.

물론 ‘나고야’ 것도 그들의 섬세한 감각으로 훌륭한 전시실을 꾸몄지만 누가 봐도 우리의 것이 앞선 것이었다.

 

감춰 놓은 스튜어디스

전시실이 개장되었다. 전시실 입구에는 예쁘게 차려입은 한복의 미인들, KAL의 스튜어디스 다섯 사람과 미스코리아 세 사람이 미소와 친절로 맞아들이고 입장하는 누구에게나 태극선과 인삼차를 선물로 주는가 하면, 실내에는 은은한 국악이 엑조딕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연출이었다.

이 미인 아가씨들은 개장 당일까지 떨어진 숙소에 발을 묶어 두었다가 개장당일에야 활짝 핀 꽃같이 나타났으니 당황한 측은 나고야였다.

게다가 노령의 손기정 선생의 사인회까지 갖게 하였으니 금상첨화격이었다.

그들도 젊은 아가씨들을 배치한 것까지는 같은 착상이었는데, 그들은 그들이 자랑하는 ‘기모노’가 아닌 양장이었다. 아무래도 화려하고 예쁜 민속의상 쪽이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임은 쉽사리 짐작이 간다. 그 때의 미인들, 큰 기여를 한 젊은 여성들이었다.

 

길에 떨어진 메모쪽지

이원웅 전문위원이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서 타이핑된 석장의 종이로 된 서류를 주웠다.

유심히 살펴보니 모든 IOC위원의 이름과 나라가 기록되어 있고 비고란에 0표 X표 △표 등의 표시가 있었다고 한다.

다름아닌 나고야 측의 득표 상황을 표시한 것이었다. 이 서류 석 장이 당장 전략회의에 자료로써 제공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가 다 간 심야에 그날의 득표활동 결과를 놓고 분석하고 내일의 전략을 세우느라 새벽부터 모임을 갖는 유치단 전략회의에서는 이 종이 쪽지에 표시된 것들이 새로운 전략정보로써 활용되었음은 물론이다.

우리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 또 하나의 일이었다.

 

제안설명을 둘러싼 신경전

1981년 9월 29일 IOC총회의 하이라이트는 하계올림픽과 동계올림픽 개최도시의 결정이었다.

그 중에서도 서울과 나고야의 2개 도시로 압축된 하계올림픽 개최지의 결정은 세계언론의 핫 이슈였다.

그 날 오후 3시, 각 후보도시의 제안설명 순서가 추첨으로 결정되었다.

서울은 나고야에 이어 오후 4시30분부터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그 전날부터 내부에서 조그만 문제가 발생하였다. IOC 총회의 지금까지의 관례와 의제순서에 따르면 후보도시의 시장이 먼저 인사를 하고, 개최후보국의 NOC위원장이 제안설명을 한 후, 준비된 필름이나 슬라이드를 상영하면 IOC위원과 ISF대표들의 질의응답이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울시측은 제안설명은 마땅히 서울시장이 해야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희망을 내비친 것이다. 주어진 시간은 20분인데 준비하여 가지고 온 제안설명을 한국어로 하고 이를 다시 영어로 통역하면 20분이 더 걸려 결국 40분이 소요되니 될 법한 일이 아니었고, IOC총회의 관례에도 어긋난다 해서 서울시 측의 요구는 철회되기를 희망하는 분위기였다.

그렇다 해서 KOC측이 KOC위원장이 꼭 해야한다고 고집하면 마치 하고 싶어서 그러느니 오해를 불러 일으킬 일일 뿐더러 서울시장의 체면도 존중하여야 하는 만큼 미묘한 문제였다.

이 답답한 문제의 해결은 IOC측에서 찾아왔다.

어떠한 경우든 제안설명은 공용어인 영어나 불어로 해야 되고 따라서 해당국 NOC위원장이 해야한다는 입장의 천명이었다. 불필요한 신경전이었다.

나고야는 모토야마시장의 인사에 이어 정작 제안설명은 고령과 노환으로 출석치 못한 아스마 류타로(IOC명예위원) 유치위원장의 유치호소를 비디오에 담아 상영하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박영수 시장이 통역을 통하여 약 31분간 간곡한 인사가 있고 난 다음 조상호 위원장의 제안설명이 시작되었다. 조상호 위원장의 정통적인 의전영어는 이미 정평이 있는 터여서, 16분간의 제안설명은 모든 청중으로 하여금 경청케하는 훌륭한 것이어서 큰 감명을 주는 것이었다.

나고야가 다케다 IOC위원의 보좌역인 히라이 혼자서 도맡아 질의응답에 임한 데 반해, 우리 쪽은 조상호 위원장, 이원경 전 장관, 유창순 전 부총리가 각각 분야별로 맡아 거침없이 질문자를 압도했으니, 제안설명이 끝난 후의 분위기는 이미 대세가 우리 쪽에 기울어진 인상이었다. 큰 일은 산고가 심한 법.

제안설명에 있어서의 우위확보는 곧이어 벌어진 결정투표에 있어서 마음을 정하지 못한 부동표를 흡수하는 데 큰 작용을 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모든 IOC 위원의 얼굴과 이름을 익혀 버린 과장

제안설명이 끝나자 IOC위원과 ISF 대표들의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이를 예상하고 서울에서 이미 작성한 150개의 예상질의 응답을 두고 협의도 하여 준비를 단단히 하였음은 물론이다.

그 중 국제체조연맹 회장인 소련의 티토프가 질문에 나섰다.

“‘재팬 타임즈’에 의하면 한국정부가 일본으로부터 60억 불의 재정지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런 형편에서 올림픽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원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유창순 대표가 선뜻 답변에 나섰다.

그 때였다. 오지철 과장이 유창순 대표에게 메모쪽지를 건넸다. 적혀 있는 것은 지금 질문한 사람의 성명과 국적 및 직위였다. 유창순 대표의 말.

“존경하는 티토프 회장! 한국은 물론 모든 국가가 정부간에 서로 차관을 주고 받는 것은 국제 경제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례입니다. 특히 한일 간은 지난 20년간 한국이 200억 불의 무역적자를 보았습니다. 한국은 이 무역적자를 시정한다는 뜻에서 앞으로 5년에 걸쳐 60억 불의 경협을 요구했고, 이는 국제호혜원칙상 타당한 요구입니다. 그리고 한국은 지금 수백억 불의 연간 수출을 하는 고도 경제 성장국입니다. 더욱이 이 경협논의와 올림픽에 대한 정부지원과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은 사항입니다.”

유창순 대표의 유창한 영어, 반론할 수 없는 답변이었다.

특히 답변 첫 머리에 “존경하는 티토프 회장!”이라는 이름 호칭에 티토프 자신도 놀라고 다른 대표들도 우리 측의 세밀한 대처에 놀라는 기색이었다.

이는 두고 두고 화제였다. 일면식도 없는 유창순 대표가 예상치도 않은 티토프의 질문에 그의 이름을 들어 답변할 수 있을까하고 말이다.

오 과장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모든 IOC 위원을 우리 대표들에게 소개하는 역을 맡았고, 그러면서도 나서지 않은 겸허함은 국제사회에서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었다고 하겠다.

김택수 씨가 IOC위원으로 선임되어 첫 총회에 참석하였을 때, 수행한 오 과장은 IOC가 발행한 IOC위원명부에 게재된 사진을 갖고 모든 위원들의 이름을 암기하여 총회 전후 김택수 위원에게 한 사람도 틀림이 없이 소개를 하였다는 일화를 갖고 있다.

그런 인재였기에 체육부가 발족되자마자 별정직 공무원으로 발탁된 오지철 씨, 역시 남다른 데가 있던 사람이었다.

 

이름없는 화환

정주영 위원장의 생각은 83명 IOC위원의 숙소에 화분을 각각 하나씩 넣으면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어떻습니가? 김택수 IOC위원의 명함을 붙여 IOC 위원의 모든 방에 돌렸으면 하는데요.”

김택수 IOC위원이 조심스러이 답한다.

“화환을 보낸다는 것, 반대하지 않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제 명함을 붙여서 보내면 같은 IOC위원끼리 비위를 맞추고 아부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제 명함은 안 붙였으면 합니다.”

정 위원장은 즉각 대꾸한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내 명함을 붙이지요. 실무자들은 곧 수배해서 모든 IOC 위원들 방에 빠짐없이 나의 명함을 붙여서 화환을 돌리세요.”

일은 이렇게 결정났다. 곧 꽃집으로 달려가서 꽃 배달을 의뢰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대한 실수가 저질러졌다. 정주영 위원장의 명함을 붙이는 것을 빼먹어 버린 것이다.

큰일이었다. 어물어물한 사이에 날이 바뀌었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나타났다.

꽃을 받은 몇몇 분들이 우리 대표들을 만나 꽃을 보내줘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분명 보내는 이의 이름도 밝히지 않았는데도 이는 틀림없이 한국측에서 보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였는데 인사를 받은 한국측도 부인하지 않으니 소문은 조용히 퍼져 나가게 되었다.

꽃 보내놓고 고맙다는 인사 받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는 동양적인 겸허함과 은근함이 오히려 그들의 심정에 좋은 영향을 준 결과가 된 것이다.

모든 일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는 행운으로 작용하는 또 하나의 작은 일이었다

물론 유치의 성공은 어느 특정인의 공로로 치부될 수 없다. 정부와 KOC, 재계와 언론계 모든 분야의 지도자들이 힘을 합친 최선의 결과였다. 그러나 이들 활동은 대개가 공표되었다. 다만 그늘에 가려져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사소하고도 눈에 띄지 않은 일이나 밑바탕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최선을 다하였는가는 기록해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참조: 서울올림픽 유치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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