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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올림픽 유치 2편

 

은밀한 활동 계속

올림픽 위원회의 방침은 굳어졌다. 비록 강력 유치론자인 박정희 대통령과 박종규 회장은 가고 물러났지만 국가적 의사결정으로 밝힌 올림픽 유치를 새로운 정부가 이를 다시 확인하고 추진키로 했을 때 아무것도 해 놓은 것이 없다면 할 바를 다하지 않았다는 책임은 면치 못한다는 당연한 책임론과 함께 올림픽 개최가 가져다 줄 엄청난 이점이 국가발전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여 올림픽 위원회로써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론이었다.

새로 취임한 이규호 문교부장관은 이 점에 있어서 적극 찬성론자였다.

이에 비해 신임 박영수 서울시장은 막대한 재정부담이 서울특별시 재정을 파탄으로 몰고갈 것이라는 우려에서 극히 회의적이었다.

KOC 즉 올림픽 위원회는 정식 신청서의 IOC 제출기일 이전의 물밑활동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스포츠 외교에는 조상호 회장, 김세원 부위원장, 최만립 부위원장 세 분이 지역과 친소를 가려 분담하되, 때로는 단독으로 때로는 함께 해외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빈약한 예산규모인 체육회가 상당한 액수에 이르는 스포츠의 외교비를 감당하기에는 힘이 모자랐다. 그렇다 해서 1979년 10월 8일의 올림픽 유치정식 발표 때 동석한 전경련, 상공회의소, 무역협회 등에서 어떤 도움을 줄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늘날처럼 체육회의 연간예산 중 국제 교류비와 스포츠 외교비가 2, 3십여 억 원 대가 아니라 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 경제기획원에 그때 그때 필요한 국고 보조금을 신청해서 쓰는 형편이었으니 답답한 일이었다. 그러나 다행한 일은 박종규 회장이 재직하는 동안 그의 영향력으로 획득해 두었던 무역협회 특계 자금 보조가 선수촌 긴급 보수공사를 마치고도 얼마간 남아 있었다. 이를 우선 사용키로 하고 문교부의 특별 배려로 어렵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스포츠 외교는 계속되었다.

세 사람의 스포츠 외교는 큰 성과를 거두는 것 같았다. 조 회장과 김세원 부위원장은 대사 출신이요, 새로 선임된 최만립 부위원장은 영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실력이어서 세 분 모두 어학실력은 나무랄 데 없었고 신중한 조상호 회장, 소신에 가득찬 애국심의 화신인 김세원 부위원장, 저돌적이면서도 인간관계 형성에 큰 장점이 있는 최만립 부위원장 트리오의 활동은 곁에서 보는 우리에게는 큰 진전이 있는 것으로 믿게 하였다.

지금도 내가 굳게 믿고 싶은 것은, 이 물밑의 초기활동이 후일의 유치성공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하였었는가를 의심치 않고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국면

표면상으로는 유치활동은 깊은 동면기에 들어간 듯 조용한 나날이 지나갔다.

5월에 광주사건이 발생하고 연이은 신군부의 집권 등 일촉 즉발의 팽팽한 정국으로 유치활동을 말할 계제도 못 되고 또 내놓고 말하는 이도 없었다. 그러나 다음번 IOC 총회는 시시각각 다가 오고 있었으니 유치여부는 어차피 결정하여야 할 처지였다. 유치에 회의적이거나 반대하는 이들의 발언도 점차 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KOC로서도 서울시 혼자의 힘으로는 개최하기 어려운 대회규모와 세계적인 경향에 비추어 비록 박정희 대통령이 유치를 결정하였다 하여도 새로운 국가수반의 의사를 물어야만 한다고 판단하여 문교부로 하여금 전두환 대통령의 결심을 받는 준비를 서두르고 있던 80년 11월 5일, IOC의 사무총장 모니크 베를리유 여사로부터 한 통의 서한이 날아들어 왔다. 내용은 “올림픽 유치 신청은 11월 31일까지이며 질의응답서는 81년 3월 1일까지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더 머물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든 안하든 간에 태도는 밝혀야만 하는 것이다. 11월 27일 서울시는 “유치의 최종 결정은 정부가 판단할 일이나 서울시의 재정적 요건을 비롯한 제반여건을 비추어볼 때 1988년의 개최시기까지에는 필요한 여러 시설을 도저히 갖출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되므로 서울시로서는 유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KOC인들 별 수 없었다. 개최지인 서울시가 그렇게 부정적이라면 어찌할 수 없는 일. 그러나 KOC는 KOC대로 유치의 가능성과 함께 개최의 득실을 상세히 작성하여 문교부에 정부지침을 다시 요청하였다.

이제 남은 몫은 독대에서 나올 최종적 결론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전임 대통령이 결심한 사안을 특별한 이유없이 변경할 아무런 이유가 없고 이 역사적인 사업을 추진도 해보지 않고 물러난다는 것은 패배의식 바로 그것이니 유치 신청은 기일내에 엄수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IOC의 서한이 11월 31일이라는 것은 분명 사무적인 착오였고 30일이 마침 일요일이니 12월 1일이나 2일에 제출해도 할 말은 있다고 판단한 KOC는 타전을 서둘렀지만 때마침 조상호 회장은 뉴델리 AGF(아시아경기연맹, 현 OCA의 전신) 총회로 인도에 머물고 있었던 때라 인도와 한국간의 텔렉스를 통한 숨가쁜 보고와 지시가 오고 갔다. 조상호 회장과 이 문교부장관은 뉴델리와 서울간의 전화와 텔렉스로 응수 끝에 드디어 12월 2일 10시 25분 문교부로부터 IOC본부에 88올림픽 유치의사를 지급 통보하라는 정부훈령이 떨어졌다.

이 훈령접수가 있자마자, “KOC는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후보도시로 서울시를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문서에 의한 정식 신청서는 추후 적절한 시기에 체출될 것이다.”라는 역사적인 텔렉스 송신이 KOC사무실에 울려퍼지기 시작한 것이 같은 날 오후 1시 50분, 이로써 일본 ‘나고야시’ 하고 정면으로 격돌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유치활동 과정에서 잊을 수 없는 일들

국무총리실에서 유치업무의 총괄을 하기 시작한 것은 이로부터 훨씬 후의 일로, 5월께부터 그 필요성이 논의되다가 ‘바덴바덴’ 총회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임박한 시점이었다.

참으로 우여곡절 끝에 KOC의 외로운 활동에서 국가적 차원으로 격상된 것이었다. 그 후의 총체적 활동상황은 익히 널리 알려진 사실이어서 이를 생략하거니와, 그 직접적 동기는 설문서가 제출되면서부터이고 그 설문서의 내용에서 비로소 KOC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는 현실 감각이 총력체재로 이끌어 냈다고 믿고 싶다.

 

설문서 답변서의 작성

1981년까지 IOC와 ISF(국제경기 연맹)가 요구하는 질문에 답한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올림픽을 치를 수 있는가의 여부를 다각적으로 물어온 문항이었다.

IOC의 설문은 일반사항이었지만 ISF설문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며 기술적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설문서에 대한 답변서를 작성하는 일은 결국 세 전문위원에게 맡겨졌다.

김성규 국제부장은 일상의 국제업무 집행에 바쁘고 오지철 과장은 위원장단의 스포츠 외교 나들이에 수행하느라 그 나름대로 이 작업에 참가할 수 없어 결국 국제부에서는 필요한 자료의 제공과 지원업무만을 맡고 세 사람의 전문위원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것은 80년말께부터다.

김예식 위원이 기획분야, 이원웅 위원이 재정, 경제, 미디어분야, 이태근 위원이 국제기구, 국제문제와 불문, 영문 번역 등으로 3분하고, 나는 사무차장이라는 직책상 작성실무반장이라는 체재로 전쟁 아닌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81년 정초도 없고 일요일도 없는 강행군이었다. 다만 눌리는 중압감은 경쟁도시 ‘나고야’와 ‘멜버른’ 보다는 더 충실한 내용의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세 사람의 전문위원에게 조언과 자료는 제공했을망정 작성실무에 가세한 사람은 없었다.

2월 중순에 접어들자 쌓인 피로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이들 세 사람 사이에서 자주 언쟁이 벌어지고 의견충돌이 잦아졌다. 날짜는 얼마 남지 않았는데 널려있는 종이쪽지 더미,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자료뭉치를 헤치고 종합된 설문서 답변이 태어날 것 같지 않았다. 18일께 최종적인 점검회의를 열고 진행 상황을 물었다. 그런데 답변은 거의 완성단계에 있다는 것이었다. 뛸듯이 기뻤다. 20일께 모든 작업을 마치고 디자인 전문가인 ‘큐빅’의 조성열 사장에게 제책을 의뢰하여 완성된 것은 25일 저녁.

영문 본문 179쪽, 불문 역시 같은 분량의 하드커버의 가제(加除)식 답변서의 완성을 보고 찬 맥주잔을 들면서 환성을 올리던 일이 어제와 같다.

참으로 험난하고도 장한 2개월의 어려운 일을 이 세 사람의 전문위원이 해낸 것이다.

이 답변서에서 산출한 올림픽 직접 경비는 6750억 원이었다. 이를 두고 후일 말도 많았지만 실제 서울올림픽 결산액이 7,700억 원이었으니 짧은 시간 세 사람이 해낸 일로 이처럼 현실에 가까운 금액을 산출해 내고, 이의 바탕이 되는 인력, 용구, 용역 등 광범위하고도 방대한 수요를 계산하여 산출해 냈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람이 없는 일이다.

본문 완성은 2월 25일었지만 표지와 차례들의 보완이 끝난 것은 3월 1일. 이를 항공편으로 보내는 방도도 있었지만, 너무나 소중한 일이어서 김예식 전문위원과 서울시장 비서관 박석현 비서관 그리고 기획관리실장 세 사람이 3월 2일 급히 스위스 로잔으로 휴대하여 제출키로 하여 떠난 것이 3월 2일이었다.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였다.

거듭 말하거니와 세 사람의 전문위원들의 노고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지

모두 후일에 올림픽 유치공로로 체육훈장 목련장을 받지만 한 사람을 빼고는 체육진흥공단에서 물러나 아까운 재능을 썩히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뒷날 일본 나고야시의 설문답변서와 우리 것을 비교했을 때 첫째 그 체재와 내용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첫째 성실히 모든 정성과 노력을 다한 흔적이 우리 것에서 쉽사리 발견됐던 데 비해 나고야 답변서는 50여쪽으로 스테이플러로 눌러 제책한 얄팍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점에 있어서 먼저 우리의 서울은 점수를 크게 따고 들어간 것이다.

 

참조: 서울올림픽 유치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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